개발하는 직장인

2021. 11. 30. 10:16

주판. 어릴 때 보이던 주판이 떠오른다. 많은 사람들은 전자제품이 흔해지며 금새 자취를 감췄다고 기억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주판 학원의 광고지를 잊을 수 없다. 전자계산기는 부정확할 수 있다. 주판을 사용하면 머리가 좋아진다. 주산 자격증을 취득해 취업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에도 시대의 변화에 주판은 사라졌다. 주판 기술자들은 어디로 간 걸까?

개발자로서 IT업계에 몸담고 사회 생활을 하다 보면 앞선 선배 개발자들이 개척해 온 문화, 그리고 시대가 변함에 따라 개선된 처우. 이 두 가지가 엮여 다른 직업보다 편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이러한 '편한' 생활에 취해서인지 특이한 모습도 보인다. '개발자는 대단한 직업이다 - 우리는 특별하다 - 우리를 룰에 엮지 마라' 마치 이렇게 주장하듯 회사를 단순히 내 포트폴리오를 채우기 위한 공간으로 치부하여 일보다 내 공부, 내 스펙이 더 중요한듯 한 모습을 보인다. 회사의 주요 목적인 수익 창출과 수익 창출을 위해 회사가 짊어져야 할 유지보수, 그리고 사업 확장에 따른 변화 가능성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고, 쓰고 싶었던 기술-언어-패러다임에 집중한다.

나는 의문이 생긴다. 그런 사람들이 회사에 소속된 정규직, 직장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처럼 IT 업계가 호황일 때에는 쉽게, 자주 이직하고 점점 더 높은 임금을 받을 수 있으니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IT업계의 불황이 온다면, 혹은 나이들어 안정된 자리를 찾고자 한다면, 4대 보험 기록에 남은 많은 회사의 기록, 그리고 대외적인 활동들이 직장인으로서 도움이 되는 커리어일까?


선배 개발자들이 지나온 시대와 지금은 다르다. 시대는 변했고 기술은 진보되었다. 하지만 선배 개발자들이 겪어온 직장인으로서의 길은 변하지 않았으리라고 생각한다. 다시 처음 언급한 주판으로 돌아가보자. 주판의 시대가 끝났을 때 주산 자격증을 가지고, 주판을 이용하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모두 직업을 잃고 도태되어 사회에서 사라졌을까? 명확한 통계나 기록을 보진 않았지만, 나는 그들이 자리를 지켰으리라 생각한다. 주판 기술자로서가 아닌, 회사 성장에 기여한 우리의 선배 기술자로서.

선배 기술자들이 만들어 온 '회사의 성장에 기여하는 기술자'라는 스테레오 타입이 깨진다면, '개발자라는 족속들은 개인주의다'라는 스테레오 타입이 만들어 진다면. 우리 사회에서 개발자라는 직업이 지금처럼 존중받는, 대우받는 직업이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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