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TC

'개발함정을 탈출하라'를 읽고

partner_jun 2023. 1. 22. 10:41

 

이 책은 PM-PO 직군, 그러니까 기획 계열의 업무 관련 도서다. 어떻게 해야 프로젝트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나갈 수 있을지에 대한 책으로 일종의 자기계발 서적이다. 자기계발 서적들이 흔히 그렇지만 250장이 넘는 책의 내용 중 얻을 것이 극소수라 부정적인 시선으로 보게 된다. 최근들어 PM-PO 직군으로 운영하는 회사가 많아져서인지 이 책을 추천 도서로 넣는 경우가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PM-PO 직군 밥그릇 내구도 강화 재료라고 보인다. 한동안 개발쪽에서도 유행했던 그런 책이란 느낌이다.

 

제목이기도 한 '개발 함정'에 관한 골자는 한줄로 요약할 수 있다. "필요없는 기능을 개발하는데 쓸데없는 시간과 인력을 소모하지 말라" 이것이다. 하지만 실무를 경험해본 사람들은 의아할 수 밖에 없다. 어떻게 "필요없다"고 판단할 수 있을까? 아무리 통계나 인터뷰를 통해 정량적인 측정을 하더라도 그것이 필요없다고 판단할 수는 없다. 이 책 후반부에서 본인이 코닥에 제안했다고 한, 현재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있는 사진 보정 기술도 그 예가 될 수 있다. 자신은 시대를 앞서가서 그런 기능을 제안했다고 자랑삼아 적어두었지만 그 당시 코닥의 입장에서는 그런 의견은 "필요없는" 기능이었을 것이다. 시대를 앞서갔다면 앞서갔기에 사용자 인터뷰에서(특히 코닥을 사용하던 사용자라면) 필요 없다고 응답했을 것이고 그런 기능, 서비스를 하기 위해 필요한 제반 작업들과 성공할지 모르는 불투명한 미래를 천칭에 건다면 어느 쪽이 기울어질지는 명백하다. 결국 의사결정은 결정권자의 마음에 따라 달라진다. 어떤 기능이든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가치가 달라지기에 본인이 옳았다는 것,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면 시도하고 실패하는 수 밖에 없다. 특히 더 어처구니 없던 부분은 이 책에서는 대부분의 사원을 바보로 여기고 짓누르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하지만 좋은 회사일수록 모든 사원은 본인의 판단과 의지에 따라 행동하기에 쓸모없어 보이는 작업을 하는 이유가 있다. 누구나 흘깃 보고도 바보같다고 생각할 정도의 행동을 하고 있다면 그건 그 사원, 팀에서 결정한 것이 아니라 더 위에서의 압박(결정권자 혹은 회사 시스템)이 있었던 것일 확률이 높다. 외부 인사에 불과한 사람이 단순하게 판단할 수 있는게 아닌, 바보같은 사정에 의한 바보같은 작업이라는 뜻이다. 그런 부분을 가장 크게 느낀 것은 책 막바지의 21장, 보상과 성과급 부분이다. 2장이 넘는 양을 할당해 나온 결론은 "직원 장려금은 중요하다. 직원 장려금 지급 방식을 재검토해보자." 이게 전부다. 이런 멍청한 소리를 적어둔 것을 보면 작가 본인도 알고 있는게 아닐까?

 

이 책을 읽으며 자기계발 서적과 너무 비슷하다는 생각에 작가의 트위터, 홈페이지를 방문해 보았다. 본인의 커리어, 포트폴리오를 위한 책이었던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이런 경향은 책 내용에서도 보였는데, 마치 저명한 학자가 만든 것처럼 '메리사 페리가 만든 프로덕트 카타'라며 아래 이미지를 첨부해두었다.

'멜리사 페리가 만든, 더 나은 프로덕트를 만드는 과학적, 시스템적 방법'이라고 소개되어 있다.

방향 이해 -> 현재 상태 분석 -> 다음 목표 설정... 한숨나오는 이런 흔해빠진 내용 둘째치고 작가 본인이 '메리사 페리'인데 제 3자처럼 언급하고 있다(번역 문제는 아닌 것 같은게 이 부분만 3인칭임). 심지어 책 내에서 소개했던 'Toyata Kata'의 내용 그대로다. 새로운 것도 아니란 것이다. 그리고 이 책은 어디서 어떤 일을 해왔는지 밝히고 싶지 않았는지 가명의 회사 이름을 걸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그렇기에 실제로 있던 일인지 각색한 소설인지도 알 수가 없다. 정말 그런 일이 있었는지 찾아보고 싶어도 아무것도 밝히지 않아(작가 본인의 설립한 회사는 아예 자료가 없는 수준) 심지어 쓸데없는 대화문도 엄청나게 많은데, 내용은 모두 '덜 떨어진 누군가'와 '대단한 본인'과의 대화다. 이야기가 질질 끌려 지루하기도 하지만, 삼류 소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천재 캐릭터 만들기' 패턴과 아주 유사하다.

 

난 이 책이 넷플릭스: 규칙없음의 완벽한 하위호환이라고 생각한다(저 책도 엄청나게 좋다는 뜻은 아니지만). 결국 의사를 결정하고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서는 각 회사의 사정 - 그러니까 인력, 자본, 시스템, 그리고 시대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이런 식으로 '조언을 주는 것 같은' 내용은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단순하게 '이럴 때는 이렇게 해야해'라며 행동 원리를 코딩해서는 안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지 않을까. 그래서 작가는 밝히지 못했던 실제 사례를 기반으로 한 도서들이 훨씬 가치있다고 생각한다. 그런 책들은 배경 상황을 설명하기도 하고, 설명하지 않더라도 직접 조사하여 어떤 상황이었기에 그러한 결정을 내렸고 외부에서는 어떤 식으로 보였는지를 거시적 관점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결론은 없다. 그냥 그런 책인걸. 이제 이런 책들이 너무 지루해진걸 보니 개발쪽 서적을 다시 볼 시간이 온 것 같다.
책을 읽다 문득 든 생각인데 CTO부터 시작해 CFO CPO CMO 이런 C 시리즈들이 엄청나게 생기는 것을 보면 10년 후엔 알파벳으로 부족해 C1O C2O같은 숫자로 넘어가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생긴다. 팀장급은 C11O 같은 식으로 코드명이 발급되면 사이버 펑크같아서 좀 멋있을 것 같다...